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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원제: Aimez-vous Brahms…)

  • 글: 프랑수아즈 사강
  • 옮김: 김남주
  •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8년 05월 02일

Marc Chagall - Birthday

⬆️ Marc Chagall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범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자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오늘 6시에 프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시몽.’

그랬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가학인 셈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로제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기를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 무엇인가가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십 년 뒤에 그녀는 혼자가 되거나 로제와 함께 지내게 되리라.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거듭 속삭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속수무책인 그런 이중성을 떠올릴 때면 시몽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배가되었다.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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