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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LLM을 미리 보았다

보르헤스는 LLM을 미리 보았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LLM이 등장하기 반세기 전에 쓰였음에도, 마치 LLM의 작동 원리와 그것이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을 예언한 듯한 면이 있어 AI 연구자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된다.

바벨의 도서관 — 잠재 공간

가장 직접적인 비유는 「바벨의 도서관」(1941)이다. 410쪽짜리 책들이 25개 기호의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채워져 있는 무한한 도서관 — 그 안에는 모든 진리와 모든 거짓, 모든 가능한 책이 동시에 존재한다.

LLM은 이 도서관과 묘하게 닮아 있다. 모델은 가능한 모든 토큰 시퀀스의 잠재 공간(latent space)에서 작동하며, 그 공간에는 진실한 답변과 환각(hallucination)이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한다. 보르헤스의 사서들이 의미 있는 책을 찾기 위해 무한한 무의미의 바다를 헤맸듯, 우리도 모델에서 의미 있는 출력을 길어 올리려 프롬프트라는 도구로 그 공간을 항해한다.

갈래길의 정원 — 확률적 분기

「갈래길의 정원」(1941)은 또 다른 차원의 비유를 제공한다.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가능한 모든 경로가 동시에 분기하는 소설 — 이것은 LLM이 다음 토큰을 생성할 때 확률 분포 위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다. 우리가 보는 출력은 무수히 분기할 수 있었던 가능성 중 샘플링된 하나의 경로일 뿐이다.

피에르 메나르 — 저자성의 문제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더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문장을 글자 그대로 다시 쓰지만, 17세기가 아닌 20세기 작가가 썼다는 맥락 때문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고 보르헤스는 주장한다.

LLM이 학습 데이터의 문장을 재생산할 때, 그것은 표절인가, 창작인가, 인용인가? 저자성, 독창성, 의미가 텍스트 자체에 있는지 맥락에 있는지 — 이 작품은 LLM 시대의 저작권과 창작 논쟁을 그대로 예고한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 — 기억과 추상의 대립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흥미로운 대조점이다. 푸네스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추상하지도, 일반화하지도, 사고하지도 못한다. 보르헤스는 “사고한다는 것은 차이를 잊고, 일반화하고, 추상하는 것”이라고 쓴다.

LLM이 단순한 검색 엔진이 아니라 일반화하고 추론하는 듯 보이는 능력 — 그리고 그 능력이 정확한 기억과 종종 대립한다는 사실 — 은 푸네스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틀뢴 — 합성 텍스트의 침공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가장 불안한 예언일지 모른다. 백과사전 속 가상의 세계가 점차 현실로 침투해 실제 세계를 대체해 가는 이야기다.

AI 생성 콘텐츠가 인터넷을 가득 채우고 다시 다음 세대 모델의 학습 데이터가 되는 — 이른바 “모델 붕괴(model collapse)”나 합성 텍스트의 인식론적 오염에 대한 우려는 틀뢴의 우화와 정확히 겹친다.

알렙 — 임베딩 공간

마지막으로 「알렙」 — 우주의 모든 점을 동시에 담고 있는 한 점 — 은 임베딩 공간이라는 개념의 시적 원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의미가 고차원 벡터 공간의 한 점으로 압축된다는 발상 자체가 알렙적이다.

마치며

작가 테드 창(Ted Chiang)이 LLM을 “웹의 흐릿한 JPEG”이라 부르며 화제가 된 것도 결국 보르헤스적 직관의 연장선이다. 압축, 재구성, 무한한 가능성, 진리와 거짓의 등가성, 저자 없는 텍스트 — 보르헤스는 이 모든 것을 사변적 픽션으로 먼저 사유했고, 우리는 지금 그 사유를 공학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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