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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숨』

『숨』(원제: Exhalation: Stories)

  • 글: 테드 창
  • 옮김: 김상훈
  • 출판사: 엘리
  • 발행일: 2019년 05월 20일

Exhalation: Stories

차례

  •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 우리가 해야 할 일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 거대한 침묵
  • 옴팔로스 ⭐
  •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pp. 56-57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p. 58
대교주님이 묻기로 결정하신다면, 저는 미래에 관해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기꺼이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제가 가진 가장 값진 지식은 이것입니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pp. 86-87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지에 대해선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들의 사고도 우리처럼 정지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당신들의 삶은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 다른 모두가 그러하듯,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평형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

pp. 94-95
나는 일 년 뒤의 미래에서 당신들에게 이 경고를 전송하고 있다. 이것은 백만 초 범위의 내거티브 딜레이 회로가 통신 장치에 장착된 이후 처음으로 도착한 장문의 메시지다. 다른 문제들을 다룬 다른 메시지들도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떠면 줄곧 그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예측기가 당신에게 끼칠 영향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p. 199
“가끔 나 돌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대답하기 전 애나는 잭스가 그녀의 얼굴을 보게 한다. “너를 돌볼 필요가 없다면 내 인생은 좀더 단순해질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만큼 행복하지는 않을 거야. 사랑해, 잭스.”
“나도 사랑해.”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p. 265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님도 당신의 의도가 선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나는 말했다.
“램셰드 박사님,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군요. 제가 보통 과학자라면, 결과가 어떻든, 그의 이론을 입증하려는 제 노력은 그 영향력의 증거가 됐겠지요. 하지만 저는 바로 그 레지널드 데이시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틀렸음을 두 번이나 입증하고 말았습니다. 제 전 생애가 아버지의 애정이 아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pp. 279-280
바로 이 지점부터 진실의 추구는 그 본질적 선함을 잃게 된다. 영향을 받는 유일한 인물들이 서로 사적인 관계일 때는 곧잘 다른 목적들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엄밀한 진실 추구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휴가를 누가 처음에 가자고 했는지 아는 게 정말 중요할까? 부부 중 어느 쪽이 상대의 부탁을 더 잘 잊어버리는지 꼭 알아야 할까?

pp. 287-288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pp. 296-297
지징기는 글 쓰는 연습을 계속했고, 점차 모스비가 한 말을 이해하게 됐다. 글이란 단지 누군가가 한 말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글은 입 밖에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어들 또한 단순한 말 조각이 아니었다. 단어들은 생각의 조각이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면 생각을 벽돌처럼 잡고 다른 배열들 속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단지 말을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단 보고 나면, 그것들을 개선시켜 더 강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p. 301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p. 329
그리고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대한 침묵

p. 340
에스퍼레이션(aspiration)이라는 단어에 염원과 숨을 뱉는 행위 양쪽의 뜻이 모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 폐의 숨을 이용해, 우리의 생각에 물리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내는 소리는 우리의 의도인 동시에 우리의 생명력인 것이다.
나는 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직 앵무새나 인간과 같은 발성 학습자들만이 이 진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pp. 342-343 우리 종은 더 이상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명을 다하지 못하고 ‘거대한 침묵’에 합류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떠나기 전, 우리는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아레시보에 있는 망원경이 그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잘 있어. 사랑해.

옴팔로스

p. 353
물론 분명,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한히 오래되었을 리는 없으므로 틀림없이 시초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만 하면 우리는 그런 시초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테가 없는 나무와 배꼽이 없는 인간의 존재는 그런 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이상의 정신적인 안도감을 줍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표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미 닻을 내리고 해저의 깊이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볼 수는 없지만 해안선이 가깝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며, 우리에게 안착할 항구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압니다. 우리의 항해 수단은 과학적 탐구이며, 제가 과학자가 된 것 역시 우리를 창조한 당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p. 363
주여, 제가 올바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소서. (…) 탐구심을 발휘해도 좋은 경우와 의혹을 부시하는 편이 나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탐구심은 유지하되, 불필요한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pp. 381-382
“(…) 나를 가르친 스승들은 신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답을 찾는 걸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요? 만약……”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습니다. “만약 신이 우리에 대해 아무런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요?”

p. 384
“과학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과학은 의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여, 저는 이제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p. 388
주여, 어쩌면 당신은 제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지금껏 기도를 드리며 그것이 당신의 행함에 영향을 끼치리라 기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영향을 끼치고 싶었던 것은 저 자신의 행함입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기도를 올립니다. 설령 당신이 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해도, 저에게는 이 기도가 가져다주는 사고의 명확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p. 390
고고학은 물리학처럼 정밀한 과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기반을 물리학에 두고 있다. 우리가 과거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은 물리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상태를 충분히 자세하게 검토한다면, 한순간 이전의 상태를 추정할 수 있다. 각 순간은 가차 없이 그 직전의 순간을 대체하고, 가차 없이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면서 인과의 사슬을 형성한다.
그러나 우주 창조의 순간은 모든 인과 관계가 끝나는 지점이다. 과거를 추론하는 것은 이 순간까지만 가능하고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해진다. 우주 창조가 기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은 그 이전에 일어난 일들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p. 391
자유의지는 일종의 기적이다. (…)
나는 태초의 인간들이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가능성들로 가득 찬 세계에 내던져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단지 살아남는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를 향상시킴으로써, 이 세계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p. 392-393
그런 연유로, 주여, 저는 당신이 굽어보고 계시든 그렇지 않든, 애리소나 발굴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 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p. 476
“하지만 분명,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p. 477
“쉽지 않다는 건 압니다.” 데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원래 질문을 기억해보세요. 우리가 다른 평행세계들에 관해 알고 있는데,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 아니었나요? 저는 단연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계에 있는 당신의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의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p. 484
“하지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
“책임을 지라는 건, 자기가 한 행동을 스스로 인정하고, 미래에 어떤 행동에 대한 결정을 내일 때 그걸 참작하라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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