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글: 김초엽
- 출판사: 허블
- 발행일: 2019년 06월 24일
차례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 스펙트럼
- 공생 가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감정의 물성
- 관내분실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p. 52
소피.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어? 시초지의 역사를 배우며 그렇게 많은 과거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 마을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연인이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p. 54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스펙트럼
p. 82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 96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숨을 거두기 전 할머니는 연구노트의 처분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기록의 사본을 남기고, 원본은 할머니와 함께 화장했다. 찬란했던 색채들이 한 줌의 재로 모였다.
나는 할머니의 유해를 우주로 실어 보내 별들에게 돌려 주었다.
공생 가설
p. 142
류드밀라는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떠나지 말라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가져가지 말라고. 자란 다음에도 계속 곁에 머물러달라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p. 187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 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
문득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감정의 물성
pp. 216-217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관내분실
p. 271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민은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던 은하가 마침내 지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p. 285
발사 전날 재경은 대기지역을 이탈했다.
재경은 우주로 가지 않았다. 대신 바다로 뛰어들었다.
p. 303
재경은 왜 마지막 순간에 우주가 아닌 바다로 갔을까. 서희의 말대로 그건 심리적 압박감을 못 이겨 내몰린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했다.
p. 305
하지만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 가운은 기묘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만약 바다에서 인간이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문득 가윤은 재경의 마지막 선택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