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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上

『시지프 신화』(원제: Le Mythe de Sisyphe)

  • 글: 알베르 카뮈
  • 옮김: 김화영
  •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6년 6월 17일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와 자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다른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
나의 대답은 그 질문에 따라 마땅히 실천하게 되는 행동이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존재론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반면에 나는 많은 사람이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죽는 것을 본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살아갈 이유라는 것은 동시에 목숨을 버릴 훌륭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건대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질문인 것이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그것은 ‘굳이 살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다.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정도의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상가들 중에
그 삶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자신의 논리를 밀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 이상으로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나날이 조금씩 더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재촉해 가는 이 경주에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이 되기는 언제나 쉽다.
그러나 끝까지 논리적으로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러므로 자살에 대한 나의 성찰은
나의 관심사인 단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부조리의 벽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
어느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날 때 느껴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한다.
뒤따르는 과정이란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다.
각성 끝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과가 생기는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원상복귀일 수도 있다.
권태 그 자체는 어딘가 좀 메스꺼운 데가 있다.
여기서 나는 이 권태가 좋은 것이라고 결론지어야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해 시작되며,
그 어떤 것도 의식을 통해서만 가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비인간성 앞에서 느끼는 이 불안,
우리의 됨됨이가 보여 주는 이미지 앞에서 경험하는 측량할 길 없는 이 추락,
우리 시대의 어느 작가가 말한 바 있는 ‘구토’,
이것 또한 부조리다.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 거울 속에서 우리와 마주치는 그 이방인,
우리 자신의 사진들 속에서 다시 만나는 친근하면서도 음산한 형제,
이것 또한 부조리다.

모든 사람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은 ‘전연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그 까닭은, 사실 죽음의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실제로 경험하고 또 의식한 것만이 체험인 것이다.
이 경우, 기껏해야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의 죽음이란 하나의 대용품이요, 정신의 관점일 뿐이므로
결코 충분할 만큼 우리를 설득하지 못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의 관심은 부조리의 발견이 아니라
거기서 이끌어 낼 귀결 쪽에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신한다면 과연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며,
그 어떤 것도 회피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의도적으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앞에서 나는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말이었다.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그 명확함에 대한 호소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메아리친다.

나는 모든 것이 내게 설명되기를,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무(無)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의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 요청에 깨어난 이성은 답을 찾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순과 억설(臆說)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비합리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철학적 자살

그렇다고 부조리의 감정이 곧 부조리의 개념은 아니다.
전자가 후자에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 그 뿐이다.

“그것은 부조리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모순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경우에든 부조리함은 두 항의 비교에서 생겨난다. (…)
부조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이혼, 즉 절연이다.
그것은 서로 비교되는 두 요소의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그 둘의 대비에서 생겨난다.

이해의 측면에서,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야말로 양자를 묶어 주는 유일한 끈이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여건은 부조리다.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과연 자살이 그 부조리의 결론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이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서
나는 이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이것은 절망과 아무 상관이 없다.)와
계속적인 거부(이것을 포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족(이것을 젊은 시절의 불안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인간은 영원히 그것에 매인다.
희망 없는 인간, 희망 없음을 의식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이 창조자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것은 이러한 역설을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조리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에 기반을 두는지 안다.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나는 이 상태에서의 삶의 규범을 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게 내놓는 제안은 그 기반을 무시하며,
고통스러운 대립의 항목들 중 하나를 부정하고 나에게 기권을 요구한다.

나는 여기서 실존적인 태도를 감히 철학적 자살이라 부르고자 한다. (…)
이것은 한 사상이 그 자체를 부정하고
바로 자기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경향을 지칭하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이다.

실존파가 생각하는 비합리의 테마는
정신이 흐려진 이성, 그리하여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해방되는 이성 바로 그것이다.
부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다.

바로 이 지난한 길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부조리의 인간은 진정한 그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요청과 그에게 제공되는 것을 비교할 때
그는 돌연 자기가 돌아서리라는 것을 느낀다.

결코 만족스럽게 해소될 수 없다는 점이 이 모순들 특유의 진실인바
이 진실을 없애 버리면 안 된다.
부조리의 인간은 설교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키그케고르가 나의 향수를 없애 버리고
다른 한편 후설은 이 우주를 하나로 합친다.
내가 기대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함께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명한 것을 은폐한다거나 방정식의 한쪽 항을 부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가 부조리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
나는 다만 자살에서 감정적인 내용을 걸러 내고
그것의 논리와 정직함을 알고 싶을 따름이다.
그 외의 모든 태도는 부조리의 정신에는 속임수요,
정신이 명백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 앞에서 뒷걸음질하는 것에 불과하다. (…)
현기증 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성실성이다.
그 외의 것은 속임수일 뿐이다.

부조리의 자유

나는 불확실한 향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나의 몫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있어도
이 통일에의 욕구, 답을 얻고자 하는 이 열망, 명백함과 수미일관함에 대한 이 요청만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에워싸고 나에게 부딪쳐 오거나 나를 싣고 가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반박할 수는 있으나
오직 이 혼돈, 이 설쳐 대는 우연 그리고 무정부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이 기막힌 등가성(等價性)만은 물리칠 수 없다.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것, 나에게 저항해 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절대와 통일을 향한 나의 열망과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순리적인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불가능성,
이 두 가지 확신을 서로 타협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야,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희망, 나의 조건의 한계 안에서는 아무런 뜻도 없는 희망을 개입시키지 않고서야,
도대체 내가 그 밖의 무슨 다른 진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뭇 나무들 중 한 그루의 나무라면, 뭇 짐승들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모든 의식과 친숙함에의 요구를 통해
내가 맞서는 이 세계 자체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나를 모든 창조물과 대립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보잘것없는 이성이다.
나는 펜으로 확 그어 버리듯 그 이성을 부정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나는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
나에게 그처럼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적인 것일지라도 지탱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계와 나의 정신의 갈등과 마찰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에 대한 나의 의식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그러나 모든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 나갈 것인가?
이 점에 관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력을 기울여 보자.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결론을 끌어내 보자.
이때 육체, 사랑, 창조, 행동, 인간적 고귀함은
이 비상식적인 세계에서 그들의 자리를 재발견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거기서 부조리라는 술과 무관심이라는 빵을 되찾을 것이며
그것을 자양분으로 그의 위대함을 키워 갈 것이다.

다시 한 번 방법 문제를 강조해 두자.
그것은 바로 고집스럽게 버티는 일이다.
길을 가다 보면 어느 길목에선가 부조리의 인간은 그에게 손짓하는 유혹을 만난다.
역사 속에는 온갖 종교, 온갖 예언자가 가득하다. 심지어는 신 없는 종교나 신 없는 예언자도 있다.
그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에게 비약할 것을 요구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도무지 분명치가 않다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것만 행하고자 한다. (…)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직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그에게 응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확실성이다.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이제 나는 자살의 개념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문제가 반대로 변했다.
앞에서는 인생이 과연 살 의미를 가지는지 어쩌는지가 문제였다.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더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살아 낸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의식에 의하여 백일하에 드러난 부조리를
자신의 눈앞에 지탱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 존재하는데
그 대립의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항구적인 혁명이라는 주제는 개인적인 경험 속으로 옮겨진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
부조리는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透明)에의 요구다.
반항은 매 순간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삼는다.
위험이 인간에게 반항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 반항은 경험 전반에 의식을 펼쳐 놓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향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알 수 있다. (…)
자살은 그 속에 동의(同意)의 의미가 전제되므로 반항과는 정반대다.
자살은 비약과 마찬가지로 한계점에 이르러서의 수용이다. (…)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 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다.

이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의식과 반항, 이 거부 행위는 포기와 정반대다. (…)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극단적인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귀결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가 아닌가를 아는 것은 나에게 흥밋거리가 아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의 자유를 경험할 따름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자유는 정신과 행동의 자유다.
그런데 부조리가 나의 모든 영원한 자유의 기회를 소멸시킨다면
그것은 반대로 나의 행동의 자유를 나에게 돌려주고 강화시킨다.
이 희망과 미래의 박탈은 곧 인간의 정신적 개방성의 증대를 의미한다.

부조리를 만나기 전의 일상적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이나 미래나 정당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
실제로 그는 마치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자유란 것이 매번 부인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부조리를 만나면 모든 것이 흔들려 버린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나의 태도,
이런 모든 것은 가능한 죽음이라는 부조리에 의해 현기증 날 것 같은 방식으로 부정되어 버린다.

죽음이 여기, 유일한 현실로서 버티고 있다.
죽음 다음에는 내기는 이미 끝난 것이다.
나 역시 이제 더 이상 영원히 생명을 이어 갈 자유가 없는 노예일 뿐이다.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의 전제에 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심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나는 내게 오로지 혐오감밖에 주는 것이 없는,
정신과 마음을 다스리는 무수한 관료들과 다름없이 행동한다.
이제야 잘 알겠다.
그 관료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인간의 자유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부조리는 나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즉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다.

바닥없는 이 확실성 속으로 빠져드는 것,
이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확실히 느낌으로써 그 삶을 확장시키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근시안이 되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떤 해방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독립은 모든 행동의 자유가 다 그렇듯이 기한부다.
그것은 영원을 담보로 한 수표를 끊지 않는다.
그러나 독립은 자유의 환상들을 대신한다.
그 환상들은 모두 죽음 앞에서 무효가 되고 만다.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귀결이다.

그와 같은 세계에서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언제나
어떤 가치 척도, 선택, 이것보다 저것이 낫다는 우리의 선호 태도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정의하는 바에 따르건대
부조리에 대한 믿음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다.

부조리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경험의 질을 양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삶에 부조리의 모습 외의 다른 모습은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만약 이 삶의 균형이 송두리째
나의 의식적인 반항과 삶이 몸부림치는 어둠의 끊임없는 대립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면,
그리고 만약 나의 자유가 한정된 운명과 관련해서만 의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는 극도로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같은 햇수를 사는 두 사람에게 세계는 항상 같은 양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의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비인간적인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찬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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