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시지프 신화』 中

부조리한 인간

“나의 영역은 시간이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말이다.
부조리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인간인가?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다.
그가 영원에 대한 향수를 조금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향수보다는 자신의 용기와 이성 쪽을 택한다.
용기는 그에게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자족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이성은 그의 한계를 가르쳐 준다.
시한부의 자유와 미래가 없는 반항과 소멸하고 말 의식을 확신하는 그는
자신이 사는 시간 속에서 모험을 추구한다.
그곳에 그의 영역이 있고 그의 행동이 있다.
그는 이 행동을 자신의 판단 이외의 그 어떤 판단에도 맡기지 않는다.

돈 후안주의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만사가 너무나도 간단하리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조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돈 후안이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전전하는 것은 결코 애정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로 그를 상상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가 타고난 재주를 되풀이해 써먹으면서 그 깊이를 더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여자를 똑같은 열정으로, 그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슬픈 사람들에게는 슬퍼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알지 못하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반면에 돈 후안은 알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며 결코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예술가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덧없는 한시적 공간 속에서도
대가답게 놀라운 넉넉함을 보이는 예술가들을 연상케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천재, 즉 자신의 한계를 아는 지성인 것이다.

육체적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이르는 날까지 돈 후안은 슬픔을 모른다.
그가 앎을 얻는 순간부터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모든 것을 용서한다.
미래에의 희망을 품었을 때 그는 슬펐다.
오늘 그는 이 여인의 입술 위에서
단 하나뿐인 지혜의 쓰디쓰면서도 힘나게 하는 맛을 되찾는 것이다.
쓰디쓴 맛? 그것은 극소량에 불과하다.
이 없어서는 안 될 불완전함이 행복을 실감 나게 해 주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현세의 쾌락을 요구했다.
그 불쌍한 사람이 그냥 손을 내뻗기만 하면 거기 있는 것인데,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해 줄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 영혼을 팔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와 반대로 돈 후안은 흡족할 정도의 쾌락을 맛보라고 영혼에게 명한다.
그가 한 여인을 떠나는 것은 꼭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항상 욕망의 대상이니까.
그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여인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그 두 가지 이유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평범한 유혹자요, 엽색가라는, 통속적인 그의 표상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돈 후안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평범한 유혹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가 유혹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뿐인데
바로 이 점으로 인해서 그는 부조리한 인간인 것이다.

돈 후안이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인
질(質)을 지향하는 성자의 그것과는 반대로 (量)의 윤리학이다.
사물들의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점이야말로 부조리의 인간의 특성이다.
그는 열띤 얼굴들 혹은 경이로워하는 저 얼굴들을 두루 훑어보고
머릿속에 저장하고 멈추지 않고 지나친다.
시간이 그와 더불어 지나간다.
부조리의 인간은 시간을 벗어나지 않는 인간이다.
돈 후안은 여인들을 ‘수집’할 생각이 없다.
그는 최대한 많은 여자를 거치며
그 여자들과 더불어 그의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소진한다. 수집한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먹고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돈 후안은 희망의 또 다른 형태인 후회를 거부한다.
그는 초상화들을 바라볼 줄 모른다.

어머니라든가 정열적인 여인은
필연적으로 메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세상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감정,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얼굴뿐
다른 모든 것은 탕진되고 없는 것이다.
돈 후안을 움직이는 것은 이와는 다른 사랑이다.
그것은 해방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세상의 모든 얼굴을 불러오며
그의 가슴 떨림은 자신이 죽어 없어질 존재임을 안다는 데서 유래한다.
돈 후안은 아무것도 아니기를 택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명확히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들과 맺어주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
나는 오직 나를 어떤 존재와 맺어주는 욕망, 애정, 지성의 혼합밖에 아는 것이 없다.
상대가 달라지면 이 혼합물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런 모든 경험을 전부 똑같은 이름으로 뒤덮을 권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이 경험들을 같은 방식으로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부조리의 인간은 여기서도 하나로 통일할 수 없는 것을 다양화한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발견한다.
그 존재 방식은 적어도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못지않게 그를 해방시킨다.
그것 자체가 덧없는 것인 동시에 독특한 것임을 의식하는 사랑만이 너그러운 사랑이다.

여기서 나는 돈 후안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돈 후안은 벌써 그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다.
의식적인 인간에게 있어 노년과 그 노년이 예고하는 바는 뜻밖의 놀라움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것에 대한 공포를 스스로에게 숨기지 않는다는 면에서 의식적인 것이다. (…)
돈 후안의 경우 사람들이 비웃을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뚜렷해진다. (…)
돈 후안이 예감하는 세계에는 우스꽝스러운 것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는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그리고 모든 게임의 규칙을 통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바로 그의 관대함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옳다는 것, 그것이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운명이 벌은 아닌 것이다.

연극

“연극, 이것이 바로 내가 왕의 의식을 낚아챌 덧이다.”라고 햄릿은 말한다.
‘낚아채다’는 딱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거나 움츠러드니 말이다. (…)
일상적 인간은 걸음을 멈추고 꾸물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이 그를 재촉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보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실제의 자신보다 장차 자기가 변해서 될 어떤 존재에 대하여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이다. (…)
부조리한 인간은 바로 그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
정신이 남의 연기를 감탄하며 구경하기를 멈추고
그 속으로 직접 들어가려고 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 모든 것이 바로 그 삶들을 연기하는 것이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것 가운데 군림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영광 중에서 배우의 영광이 가장 덧없는 것이다. (…)
그러나 영광이란 모두 덧없는 것이다. (…)
모든 영광 중에서 가장 덜 거짓된 것은 스스로 체험하는 영광이다.
그렇기에 배우는 헤아릴 수 없는 영광,
스스로를 바치고 스스로 체험하는 영광을 선택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에서 최선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배우다. (…)
배우는 기껏해야 우리에게 한 장의 사진을 남겨 놓을 뿐,
그의 모습, 동작과 침묵, 짧은 숨결 혹은 사랑의 숨소리는 전혀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것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가 생명을 부여하여 새로이 살아나게 할 수도 있었을 모든 존재와 더불어
무수히 여러 번 죽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뭇 세기와 뭇 정신을 편력하고,
있을 수도 있는 모습의 인간 그리고 실제 모습 그대로의 인간을 모방하다 보면
배우는 여행자라는 또 하나의 부조리의 인물과 합류한다.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언가를 소진하며 끊임없이 편력한다.
그는 시간의 나그네요, 최상의 경우 숱한 영혼을 편력하며 쫓기는 여행자인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존재와 실제 존재 사이에 경계가 없다는
지극히 의미 깊은 진리를 매월 혹은 매일 유감없이 보여 준다.
더욱 실감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늘 고심하는 그가 증명해 보이는 것은
바로 어느 정도로 외양이 실재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흉내 내는 것, 자신의 것이 아닌 삶 속으로 가능한 한 깊숙이 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이 종국에 이르면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즉, 마음을 다하여 아무것도 아니거나 여러 존재가 되고자 전력투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배우는 자기모순을 드러내 보인다.
즉, 동일하면서도 지극히 다양하고,
단 하나의 육체에 의하여 그토록 많은 영혼이 요약된다는 배우의 모순이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취하고 모든 것을 살고자 하는 저 인간, 저 헛된 시도, 저 부질없는 고집,
그것은 부조리의 모순 그 자체다.
그럼에도 항상 자기모순에 차 있는 것이 그의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서로 만나 껴안는 곳,
온갖 실패에 지친 정신이 그의 가장 충직한 맹우(盟友)에게 되돌아가는 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배우의 운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끼기 위해서는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해 보아도 충분하다.
그가 인물을 구성하고 열거하는 것은 시간 안에서이다.
그가 그들을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시간 안에서이다.
그가 서로 다른 수많은 삶을 체험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쉽게 그 삶들과 작별한다.
그가 무대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할 시간이 온다.
그가 겪으며 살아온 것이 그의 면전에 있다.
그는 똑똑히 본다.
그는 이 모험이 지닌 비통하고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느낀다.
이제 그는 죽을 줄 알며 또한 죽을 수 있다.
세상에는 늙은 배우들을 위한 양로원들이 있다.

정복

한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보다 침묵하는 것들에 의해서 한결 더 인간이다.

나는 나의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기에
이 시대와 일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리로 끝날 대의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를 귀하게 여긴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승리건 패배건 상관없이
영혼을 송두리째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 세계의 운명과의 연대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문명들의 충격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는 동시에
그 안에서 나의 못을 맡고자 했다.
나는 확실한 것들을 사랑하기에
역사와 영원 두 가지 중에서 역사 쪽을 택했다.
역사에서라면 적어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를 짓누르는 이 힘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관조와 해동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언제든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 분열의 고통은 끔찍하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마음에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
시간과 더불어 살고 시간과 더불어 죽거나
보다 위대한 어떤 삶을 위해 시간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을, 세기 속에 살면서 영원을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를 가리켜 동의(同意)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혐오한다.
나는 전체 아니면 무(無)를 원한다.
내가 행동을 선택한다고 해서 관조가 내게 미지의 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러나 관조가 내게 모든 것을 줄 수 없거니와
나는 영원을 갖지 못하기에 시간과 한 편이 되고자 한다.
나는 향수도 원한도 고려하고 싶지 않으며
오직 명확하게 보고자 할 따름이다. (…)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개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경탄할 만큼 자유로운 처분 가능성 속에서
당신은 왜 내가 개인을 앙양하는 동시에 짓밟는가를 이해한다.
개인을 짓뭉개는 것은 세계이고 그를 해방시키는 것은 나다.
나는 그에게 그의 모든 권리를 제공한다.

비록 욕된 것일지라도 육체는 나의 유일한 확신이다.
나는 오직 육체로만 살 수 있다. 피조물의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부조리하고 보람 없는 노력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투쟁의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오직 한 가지일 뿐이니 그것은 바로 영원한 승리다.
그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거두지 못할 승리다.
그것이 바로 내가 부딪치고 매달리는 부분이다.
현대의 정복자들의 시조인 프로메테우스의 혁명을 위시하여
혁명이란 무릇 신들에게 항거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운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권리 주장이다. (…)
본질적인 모순과 맞서서 나는 나의 인간적 모순을 지탱한다.
나는 나의 통찰을 부정하는 것의 한복판에 나의 통찰을 확립시킨다.
나는 인간을 짓누르는 것 앞에서 인간을 찬미하고
그때 나의 자유, 나의 반항, 나의 열정은
그 긴장, 그 통찰 그리고 그 기상천외의 반복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
이제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정복자들은 이따금 승리하는 것과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들은 잘 안다.
인간은 저마다 어느 순간 자기가 어떤 신과 동등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섬광 같은 한순간 인간 정신의 놀라운 위대함을 느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정복자들이란 끊임없이 그러한 절정에서, 그런 위대함을 뚜렷하게 의식하며
살아감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힘을 느끼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는 산술의 문제, 즉 많고 적음의 문제다. 정복자들은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원할 때 인간 자신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적 용광로의 아궁이를 결코 떠나지 않은 채
혁명의 혼 속의 가장 뜨거운 곳으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의 운명은 바로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운명에 도전하는 것이다.
오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망 없는 우리의 조건을 뚜렷이 의식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절망한다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뒤가 맞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만약 지혜롭다는 말이 자신이 갖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적용된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그들 중 한 사람, 가령 정복자(단 정신의), 돈 후안(단 지식의), 배우(단 지성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부조리한 창조

철학과 소설

정복 혹은 연기, 무수한 사랑, 부조리한 반항 같은 것들은
인간이 미리부터 패배한 전장에서 자신의 존엄성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전쟁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오직 그 전쟁으로 인하여 죽든가 살든가 해야 한다.
부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것,
그것이 주는 교훈을 인정하고 그것의 살을 되찾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바로 창조다.
“예술, 오로지 예술.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기에 진리로 인하여 죽지 않을 수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모두가 자신의 현실을 흉내 내고 반복하고 재창조하려고 고심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진실들로 만들어진 얼굴을 갖게 마련이다.
영원에 등을 돌려 버린 한 인간에게
생존은 송두리째 부조리라는 가면을 쓰고 하는 엄청난 무언극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란 위대한 무언극이다.

부조리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묘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통찰력을 갖춘 무관심이다.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다.
과학 역시 그 역설들의 끝에 이르면 제안하기를 그치고 발을 멈춘 채
제 현상의 항상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그처럼 우리는 세계의 모습들 앞에서 솟구치는 이 감동이
세계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 다양성에서 온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다.
설명은 헛된 것이지만 감각은 없어지지 않고 남는다.
그 감각과 더불어 양적으로 무궁무진한 한 세계가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술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예술 작품은 한 경험의 소멸과 동시에 그 증식을 나타낸다.
그것은 세계가 이미 작곡해 놓은 여러 가지 주제들의 단조롭고도 열정적인 반복과 같은 것이다.

예술 작품이 부조리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병에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 전체에 그것을 메아리치게 하는 그 병의 한 징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처음으로 정신이 그것 자체 밖으로 나오게 하여 타자와 대면시킨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정신이 길을 잃고 헤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몰려들고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기 위해서다.
부조리한 추론의 단계에서 창조는 무관심과 발견의 뒤를 따른다.
그것은 부조리한 정열들이 내닫는 출발점을, 추론이 정지하는 지점을 가리켜 보인다.

인간이 이해와 사랑을 위하여 창안해 낸 여러 가지 분야 사이에 경계선이란 없다.
그 분야들은 상호 침투하며 동일한 고뇌에 사로잡혀 있어서 서로 분간하기가 어려워진다.

부조리의 작품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가장 명철한 형태의 사고가 그 속에 개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돈하는 역할의 지성으로서라면 모르지만
그 사고가 겉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 패러독스는 부조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지성이 구체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따지기를 포기함으로써 생겨난다.
예술 작품은 육체적인 것의 승리를 표시한다.
작품이 생겨나는 발단은 명철한 사고지만
바로 그렇게 하는 행위 속에서 사고는 스스로를 버린다.
사고는 묘사된 것에 보다 깊은 어떤 의미를 덧보태고 싶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가 온당치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지성의 드라마를 구체화하여 나타내 보이지만
그것을 오직 간접적으로 입증할 따름이다.
부조리한 작품은 이러한 한계를 의식하는 예술가를 요구하며,
구체적인 것은 그냥 그것 자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예술을 요구한다.

진정한 작품은 본질적으로 ‘더 적게’ 말하는 작품이다.

부조리의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요령의 차원을 초월하여 사는 법을 획득하는 일이다.
결국 이런 풍토에서 위대한 예술가란 무엇보다 먼저 잘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산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느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지성의 드라마를 구체적으로 육화 하여 보여 준다고 하겠다.
부조리한 작품은 사고가 그것 본래의 특권을 포기한 채,
오직 겉모습만을 작품화하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한낱 지능일 뿐임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만약 세계가 확실, 명료한 것이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혹은 결국 같은 말이지만 자신의 세계를 한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그의 경험과 갈라놓는 근원적인 불화에서 출발하여
그의 향수에 따른 화해의 소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참을 수 없는 절연 상태를 해소하게 해 주는 세계,
이성에 의하여 완벽하게 규제된, 혹은 유사점들에 의하여 환하게 조명된 세계를 찾고자 한다는 의미다.

한 장르의 풍부함과 위대함은
흔히 그 장르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에 의해 측정되는 수가 있다.
졸렬한 소설이 많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소설가들의 위대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소설들은 바로 그들의 세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소설은 그 자체의 논리와 추론, 직관과 가설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분명해야 한다는 요청에도 응해야 한다.

문체보다 생각이 더 중요해진 순간부터 다수의 대중이 소설을 점령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크게 나쁜 일은 아니다.
가장 탁월한 사람들은 결국 그들 자신에 대해 보다 엄격해지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이 길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위대한 소설가는 (…) 발자크, 사드, 멜빌, 스탕달,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말로, 카프카 (…)
추론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통해 글을 쓰는 쪽을 택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에게 공통된 어떤 생각을 드러내 보인다.
즉 그들은 일체의 설명적 원리란 무용하다는 것과
감각적 외관이 교훈적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음을 굳게 믿는다.
그들은 작품이 끝인 동시에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대개의 경우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않은 어떤 철학의 귀착점이며, 조명이며, 완성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 철학의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암시들에 의해서만 완전한 것이 된다.

설익은 사유는 그 주제를 삶에서 멀어지게 하지만
깊이 있는 사고는 그것을 삶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현실을 승화시킬 수 없게 되면 사유는 현실을 모방하기에 그친다.

부조리한 태도가 부조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무상성(無償性)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작품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다.
만약 작품에서 부조리의 계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만약 작품이 벌연과 반항을 조명해 보이지 않는다면,
만약 작품이 환상의 제물이 되어 희망을 사주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무상한 것이 되지 못한다.

키릴로프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주인공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자문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근대적이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움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일기』에서 논리적 자살이라고 일컫는 귀결이다. (…) “원고인 동시에 변호인, 재판관인 동시에 피고라는 명백한 자격으로서 나는,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뻔번스럽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어 고통받게 하는
이 자연을 단죄한다. 나는 자연이 나와 함께 멸망할 것을 선고한다.”
이러한 입장에는 아직도 약간의 유머가 섞여 있다.
이 자살자는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삐쳤기’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복수하는 셈이다.
그것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악령』에 등장하는 (…) 키릴로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어디선가 말한다.
“나는 나의 불복종, 나의 새롭고 무시무시한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 자살하겠다.”
문제는 이미 복수가 아니라 반항이다.
그러므로 키릴로프는 한 사람의 부조리한 인물이다.

내일 없는 창조

그러므로 여기서 희망이란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덤벼들 수 있는 것임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오직 부정적 사고에 의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치 백색을 이해하자면 흑색이 필요한 만큼이나
부정적 사고의 하찮고 겸허한 방식들이 위대한 작품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헛되이’ 작업하고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신이 만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수세기에 걸쳐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조리의 사고가 가능케 해 주는 어려운 얘지(叡智)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찬양하는 이 두 가지 사명을 한꺼번에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린 길이다.
그는 허공에 자신의 색깔을 칠해야 한다.

인내와 통찰을 배우는 모든 학습장 중에서 창조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장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이 지닌 유일한 존엄성의 기막힌 증언이기도 하다.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집요한 반항,
불모의 것인 줄 잘 알면서도 노력을 계속하는 불굴의 인내가 그것이다.
창조는 나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생이다.
그런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을 위해서’,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나는 내가 사고에 요청했던 것,
즉 반항과 자유와 다양성을 부조리한 창조에 대해서도 요구한다.
부조리한 창조는 그다음에 그것 자체의 본질적인 무용성을 드러낼 것이다.
지성과 정열이 서로 혼합되어 서로를 열광케 하는 나날의 노력 속에서
부조리의 인간은 그의 힘들의 핵심이 될 어떤 규율을 발견한다.
거기에 필요한 열성과 집요함과 통찰은 정복자와 같은 태도와 결합된다.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인물에게 있어 그들의 작품은 적어도 그들에 의해 작품이 정의되는 만큼 그들을 정의한다.
배우는 이미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있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그 출구만이 숙명적인 운명이다.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를 얽매어 놓던 것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