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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下

Punishment_sisyph

시지프 신화

우리는 이미 시지프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의 열정뿐 아니라 그의 고뇌로 인해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날들에는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쁨 속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지프를 상상해 본다.
그것은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
엄청난 비탄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무겁다. (…)
그러나 우리를 짓누르는 진리들도 인식됨으로써 사멸한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이 세상에 비끄러매 놓는 유일한 끈은 한 처녀의 싱싱한 손이라는 것을 안다.
이때 기가 막힌 한마디 말소리가 울린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모종의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라고! 이처럼 좁은 길들을 통해서……?”
그러나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행복이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또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니며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불만과 무용한 고통의 취미를 가지고 들어온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그 한마디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代價)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그가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이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 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 남겨 준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볼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