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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이어령의 말』

  • 글: 이어령
  • 출판사: 세계사
  • 발행일: 2025년 02월 26일

A child representative, Tae-Woong Yoon, is rolling an iron hoop in the opening ceremony of the 1988 Summer Olympics in Seoul


절망

우리들의 병은 철저하게 고민하지 않고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는 데 있다. 사람은 어렴풋한 희망이나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언제나 자신과 그 주위의 어둠을 기만하려 든다.

비극

참된 비극은 슬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감추려는 그 행위 속에 있다.

사랑

사랑은 관찰이 아니다. 잠수다. 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

사랑이 좋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데 있다. 그러기에 사랑은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별처럼 아픔을 통해서만 서로 만져볼 수 있는 지고한 희열인 것이다.

아무리 철없는 때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평화보다도 투쟁의 감정에 가깝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를 딸 수 없다는 그 비극, 죄를 짓지 않고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인간의 그 형벌.

유머

유머는 그냥 ‘우스운’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 혹은 ‘인생을 대하는 너그러운 태도’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긴박할 때, 절망적일 때 그리고 분노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기질, 그것이 바로 유머이다.

고독

고독한 자는 자기 무죄를 증명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고독의 세계에는 증인이란 것도 없다.

감수성

늙어갈수록 감수성이 무디어진다. 감수성은 젊음만이 지닐 수 있는 월계관이다. 그래서 감수성에는 미숙한 떫은맛이 있다

자기비하

순간순간… 주어진 일을 불사르려는 열정, 티끌과 먼지라도 사랑하려는 의지…. 이러한 능동적인 행동으로 인생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나나’의 비극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눈물

눈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액체의 하나입니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생겨나듯이 눈물을 흘려야 그 영혼에도 아름다운 무지개가 돋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수단

현대인은 자기 짐을 덜기 위해서 사랑을 하지요. 고통을 피하고 마비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합니다. 권력의 수단, 돈의 수단, 세속적인 생활의 방편으로 사랑을 이용하는 겁니다. 자동기계를 이용하듯이 ‘러브 머신’의 시대가 온 것이지요. 사랑은 구식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해야 해요.

권태

신은 인간에게 권태를 주었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인간은 ‘놀이’를 만들어야 한다.

연대

생을 부조리로 보고 있는 실존주의에서는 연대의식을 통해 실존을 극복하려고 한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고 각자가 외로운 별들처럼 제 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개개인은 그러한 홀로 사는 각자의 의식, 각자의 고독을 통해서 서로 함께할 수가 있다. 겨울에 추위를 느낀다는 것은 내 추위이지만 동시에 겨울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의 추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낙원

지상에 낙원이 오리라는 희망은 없다. 다만 그 마지막 날까지 수인처럼, 고뇌의 낙인이 찍힌 몸으로, 서로 공감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해보자는 것이다. 이미 던져진 삶이니 슬프고 괴로워도 같이 참으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화려한 꿈은 없다. 겸허한 이해에 선 조그만 계획이 있을 뿐이다.

의미

시인이나 작가는 반대어를 창조해주는 사람이다. 기쁜 것에 대해서는 괴로운 것을,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기쁜 것을…. 그는 언제나 반대어를 만들어줌으로써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들 앞에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사물의 의미를 온전케 한다. 대낮으로 밤을 더욱 어둡게 하며 밤중의 언어로 대낮을 더욱 밝게 해주는 것이다. 이 반대어의 기능, 그것은 상상과 창조의 원초적인 작업의 첫발이다.

타락

동물은 타락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타락할 수가 있고 인간만이 후회를 한다. 그 어둠에서 투명한 언어가, 그 탄식과 아픔에서 일찍이 어느 짐승도 가져보지 못한 영혼의 양식이 생겨난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상은 메말라지고 그 죄악은 더욱 어둠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감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의 완전함을 지닐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등대

등대의 외로움이 있을 때 항해하는 배의 외로움은 사라진다.

등대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 사회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영혼

내가 이 우주의 유일자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작 하나를 패도 그 도끼 소리에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음악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정보

정보의 최종 가치는 정보 자체의 품질보다는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판이 난다. 물질로 된 제품은 품질로 승부를 한다면, 정보통신은 믿음으로 승패가 결정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나그네가 한 마을을 지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문학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세계와 인류의 마음, 안개에 싸인 신비한 그 상상의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행이다.

연필

구르지 않고 손에 잡기도 편한 것이라면 원과 사각형의 중간, 여섯 모난 연필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섯 모로 된 연필이 제일 많습니다. 둥글게 살면 원만하다고 하지만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주장만 하면 모가 나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듭니다. 네모난 연필도 아닙니다. 둥근 연필도 아닙니다. 여섯 모난 연필로 나의 인생을 써가십시오.

여행

사람들은 흔히 패스포트에 비자의 스탬프만 찍히면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언어라는또 하나의 국경이 있는 것이다. 언어! 그것이야말로 이방인의마음속을 여행하는 참된 비자다.

번역

번역의 불가능은 그것이 ‘이식 불가능’의 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글에서 벗어난다. 심하게 말하자면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의 포화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소낙비처럼 글을 쓴다.

글 쓴다는 것은 말을 찾는 거야. 만드는 게 아니라 찾는 거야.

암기

암기한다는 것은 어떤 사상에 항복한다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시도 암기하고 있는 순간만은 축문과 다를 게 없다.

은어

은어나 속어에는 생명의 원시성과 현실성이 충만해 있다. 닳고 닳은 전통적인 언어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롭고 힘찬 호흡이 있다는 이야기다. 시인이 참된 시대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선, 또 살아 있는 언어를 살리기 위해선, 또 살아 있는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은어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어

반대어가 없을 때 그 말은 안갯속에 파묻혀버린다. 사람들은 불행이 무엇인지는 잘 알면서도 행복이 과연 어떤 것인가는 잘 모른다. 다만 그것은 불행의 반대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 반대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행의 의미를 한층 더 뚜렷이 알고, 어디엔가 불행의 어둠과는 다른 찬란한 행복의 빛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반대어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겐 절망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악마가 있으면 신이 있고, 병이 있으면 건강이 있다. 속박이 있으면 자유가 있고, 순간이 있으면 영원이 있다.

글쓰기

나는 언제나 타자로부터 그리고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 마지막에는 내 몸뚱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추락

아무리 세속의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꿈(문학)속에서 늘 추락하리라. 나의 지식으로부터, 재력으로부터, 명성이나 박수 소리로부터 자진해서 추락하는 꿈을 꾸어야만 내 신장은 멈추지 않고 커갈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에 속지 않기 위해서.

비평

비평가의 진짜 도구는 펜이 아닌 망치예요. 자기 자신과 자유로운 문학적 상상력을 숨 막히게 가두고 있는 벽을 부수는 망치질부터 시작하는 거지.

극장

돈을 지불하고 울러 가는 극장의 모순. 이 모순이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겐 희망이 있다.

거리

인간은 무엇을 사랑하기 위해선 먼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신을 완벽한 대상으로 갈구하는 것도 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원한 곳에 그가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죄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예요.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소요(逍遙)

인간은 이유와 필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모든 계산과 이유에서 벗어나 그냥 살 줄도 알아야 한다.

자연

우리의 경우에선 ‘자연’ 그 자체에 모럴의 근원과 그 질서를 부여한 것이어서 도리어 자연을 따른다는 것과 인간의 도덕을 좇는다는 것은 대립이 아니라 동의어로 쓰입니다.

비움

우리도 아이처럼 매일 자란다. 그러니 조금 전까지 통했던 상식과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변한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들, 집념이나 원한도 모두 버려야 한다. 지식도 영양분처럼 넘쳐날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샘물은 퍼 써야만 새 물이 고인다. 고여 있는 지식도 퍼내야 새로운 생각이 새살처럼 돋는다.

쓰다

지우개 달린 연필은 모순 그 자체다. 한 몸에 쓰는 의지와 내가 쓴 걸 지우는 의지가 함께 담겨 있다. 여러분들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잘못 쓴 글들은 모두 지워라. 0을 만들어라. 그리고 새로 써라. 그런데 새로 쓰는 것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느 때가 되면 또 지워라. 끝없이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죽을 때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지우개 달린 연필처럼 끝없이 쓰고 지워라. 이렇게 해서 평생 동안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쓰고 지우며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물음과 느낌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파괴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야. 창조를 하려면 먼저 파괴를 해야 돼.

갈증

한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갈증의 의미를 모른다. 갈증, 그것은 나그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통스러운 특권이다.

나눔

예술적인 공감은 나눌수록 커지지만 돈이나 권력이나 물질은 함께 나눌수록 자기 몫이 적어져요. ‘이익’을 나누는 세계… 그것이 소비의 세계라면 공감을 나누는 세계는 창조의 세계예요.

질문

서투른 음악이 때로는 명연주보다도 감명을 줄 때가 있다. 잘 정리된 철학자의 인생론보다도 철없는 아이의 질문이 진리에 한층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아름다움

사람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단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

똑같은 시간이라도 모두 길이가 달라. 아니, 시간의 길이는 똑같은데 마음속에서 시간을 길게 느끼기도 하고 짧게 느끼기도 하지. 그 시간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로 ‘철’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거야. 그러니까 ‘철이 든다’는 것은 바로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거꾸로

나는 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나는 늙었을 때 생(탄생)을 알았다.
거꾸로 산 것이다.

마지막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
돌멩이, 참새, 구름, 흙, 어렸을 때 내가 가지고 놀던 것, 쫓아다니던 것, 물끄러미 바라다본 것.
그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었음을 알 때까지 사랑하자.

호흡

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에게는 그게 숨 쉬는 거예요.
지식인들이 이 호흡을 안 하면 죽어요.

흔적

‘글’은 암벽 같은 딱딱한 것을 긁는 것을 어원으로 합니다.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긁다, 그리움, 그림 전부 글에서 나온 겁니다. 책은 글입니다. 말과는 다릅니다. 어떤 흔적을 남기니까 시간이 공간화됩니다. 말한 것은 사라지지만 긁는 것은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리움은 마치 책에 글자처럼 여러분 가슴속에 긁혀져 있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글은 말과 달리 흔적을 남깁니다.

정보통신

통신 위성이 지구 구석구석을 이어주는데 바로 옆 아파트의 독거노인의 죽음은 우편물이 문 앞에 쌓여야만 비로소 아는 세상입니다.
정보통신情報通信을 한자로 써보세요. 영어에는 없던 정과 믿음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날 겁니다.

자연

자연이란 언제나 뜻이 없는 것, 아름답지도 않고 추악하지도 않고 그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아름답다거나 추악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 있을 따름이다.

여름

여름은 개방적이다. 닫힌 창이란 없다. 모든 것이 밖으로 열려 있는 여름 풍경은 그만큼 외향적이고 양성적이다. 북방 문화가 폐쇄적인 데에 비해서 남방 문화가 개방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름의 숲은 푸른 생명의 색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숲속은 벌레들의 음향으로 가득 차 있다. 은폐가 없고 침묵이 없는 여름의 자연은 나체처럼 싱싱하다.

꽃은 평화가 아니다
저항이다
빛깔을 갖는다는 것,
눈 덮인 땅에서 빛깔을 갖는다는 것
그건 평화가 아니라 투쟁이다

맷돌

맷돌은 한 짝만으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두 개의 돌이 서로 마찰을 할 때 딱딱한 곡물은 부드러운 가루가 된다. 세대도 맷돌의 법칙을 모방한다. 기성세대는 고정되어 있는 맷돌짝이요, 젊은 세대는 그 위에서 끝없이 돌고 움직이는 또 한 짝의 맷돌이다. 그 마찰 속에서 문화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운 가루가 된다.

영웅

영웅들은 그 최후로써, 말하자면 멸망으로써 자기 자신을 증명한다. “희극의 주인공에는 영웅이란 없다. 오직 영웅만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영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멸망할 것이 두려워 영웅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책임

‘책임’이라는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지요. ‘대답하다’는 뜻의 response와 ‘능력’이란 뜻의 ability가 결합된 말이지요. 결국 내 인생에 책임을 지려면 나는 내 인생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이즈

사람과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기침, 표정 등 콘텐츠 메시지 이외의 많은 노이즈noise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야기 중심의 콘텐츠는 반드시 책으로, 문자로, 음성으로 잘 다듬어진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정보 전달은 항상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외에 불필요한 노이즈들이 낀다는 거예요. 그 노이즈가 꼈을 때 정말 생생한 정보가 되는 것이죠.

열린 악은 닫힌 선보다 희망이 있어요. 내일이 있는 겁니다.

기대

가장 불행한 사형수는 어쩌면 특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그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다. 부질없는 기대는 사형보다 더 큰 형벌이다. 인간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이중의 형벌을 지닌 수인이다.

병은 내가 혼자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아픔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외부와 나를 끊어놓는다. 병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친숙했던 모든 것이 실상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아니 본질적으로 생명을 느끼게 한다. 생명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모른다. 병은 이상하게도 나를 생명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에 생명을 강렬하게 인식시켜준다.

모험가

모험가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움직이고 거부하고 뛰어들고, 그러면서도 아무 결과도(실리적인 것)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데서 그 모험의 생명이 있다. 그리하여 모험적 인간은 절망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후회하지도 겁내지도 않는다. 따라서 모험가는 으레 향수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다. 생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다. 돌진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가벼운 몸차림으로 과거와 서슴지 않고 몌별袂別한다. 그러므로 모험적 인간이란 자기 운명의 창조자이며, 반전통주의자이며, 반지성주의자이며, 반개성주의자이며, 실험적 인간이며, 따라서 유쾌한 하나의 해방인이다.

독백

아이는 가끔 혼잣말을 잘한다. 인형이나 강아지나 아이들은 상대편에서 말을 들어주고 대꾸를 하지 않아도 침묵하는 것들을 향해서 말을 건다. 독백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세계의 모든 것과 대화를 한다. 그렇게 해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키가 성장을 멈추면 사람들은 혼잣말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독백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독백을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어른들은 대화를 하면서 독백을 한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이다.

부조리

어둠 없는 광명이 어디 있는가?
죽음 없는 생명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인간의 부조리.
그러나 이 부조리를 사랑하는 자만이 생을 소유한다.

역설

그릇을 텅 비워야 새 물로 채울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도 일단 듣고 나면 이내 지워버리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슴을 채워야 합니다.
제 말을 잊어주십시오.
이것이 제가 역설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말입니다.

해저

파도에 밀려 표류하지 말고 바닷속으로 들어가자. 저 깊숙한 현실과 역사의 해저에 닻을 내리자. 바람과 관계없이 진짜 생명이 유영하고 있는 그 바닷속으로 잠수하자.
그러려면 내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제2의 피부인 잠수복이 필요할 거다…
그 잠수복이 바로 나에게는 언어요, 상상력이요, 창조력이요, 예술이라는 생명 장치였던 겁니다.

낙엽

나뭇잎은 ‘죽음’의 순간에 완전히 사는 것이다. 태양이 그에게 준 온갖 채색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바람이 그에게 가르쳐준 율동을 그 순간에 몸소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미아

미아는 새로운 세상 앞에 홀로 내던져진 것을 알았을 때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탄생임에 틀림없다. 낯선 곳에 대해서 그는 우는 것이다.

투우

헤밍웨이는 인생을 투우에다 비유했다. 팜플로나의 넓은 광장, 돌진하는 황우 앞에서 투우사는 붉은 물레타를 휘두르고 있다. 스스로 위험과 죽음을 불러일으켜 황우의 뿔을 향해 접근해가는 투우사의 자세.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명예도 돈도 사랑도 생명까지도. 허무를 향해 도전하는 투우사에겐 관중의 박수도 필요 없다. 오직 ‘죽음과 대결’하는 음악 같은 순수한 영혼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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