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 선언』
『한살림 선언』
이 선언문은 한살림운동의 이념과 실천방향을 확립하기 위해 가진 공부모임과 토론회에서 합의된 내용을 집필하여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것이다.
전문은 한살림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아래에는 주요 내용 발췌, 요약.
1. 산업 문명의 위기
풍요로운 산업사회에서 물질적 안락을 누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넘쳐 흐르는 상품의 홍수 속에서 넋을 잃고 상품의 소유와 소비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생각, 느낌, 활동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 지식과 노동을 상품으로 파는 소외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산업문명은 생명을 기계로, 존재를 소유로, 주체를 객체로, 주인을 노예로, 지식을 기술로, 자유를 동조로, 노동을 상품으로, 낭비를 필요로, 파괴를 생산으로, 가격을 가치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전도된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오늘날 산업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다음과 같은 증후(症候)로 나타나고 있다.
- 첫째, 핵위협과 공포이다.
- 둘째, 자연환경의 파괴이다.
- 셋째, 자원고갈과 인구폭발이다.
- 넷째,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이다.
- 다섯째,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이다.
- 여섯째, 중앙집권화된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이다.
- 일곱째,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이다.
2.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서구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산업주의는 직관적 지혜보다는 분석적 지식을, 통일보다는 분리를, 조화보다는 대립을, 협동보다는 경쟁을 더 치중해 왔었다. 이러한 편향된 지향과 시각이 문화의 전반적인 불균형, 즉 인간과 자연, 사고와 감정, 존재와 가치의 불균형을 유발함으로써 산업문명은 사회적, 정치적, 생태적 분열과 갈등으로 야기되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학적 방법과 분석적 합리성만을 강조하는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날의 산업사회 전반에 깊숙히 뿌리를 박고 있다.
산업문명을 옹호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 첫째, 과학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이다.
- 둘째, 실제(實在)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존재론이다.
- 셋째, 물질과 우주를 기계모형으로 보는 고전역학이다.
- 넷째, 생명현상을 유기적으로 보지 않는 요소론적 생물관이다.
- 다섯째, 인간정신을 기계모형으로 보는 영혼 없는 행동과학과 육체 없는 정신분석이다.
- 여섯째, 직선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이론이다.
- 일곱번째,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생태적 자연관이다.
3. 전일적(全一的) 생명의 창조적 진화
살아있는 생명은 끊임없는 동요와 진동 속에서 변화를 억제함으로써 기존의 구조를 유지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변화를 촉진하고 증폭함으로써 낡은 구조를 버리고 새 질서로 진화하는 자기 초월을 수행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모든 생명은 그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우주적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자신 안에 우주적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라 할 수 있다. 생동하는 우주의 진정한 모습은 모든 생명을 하나의 생명으로 아우르면서 진화하는 큰 생명의 무궁한 펼쳐짐이라 하겠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환경과 협동하여 공진화(共進化)하면서 우주의 궁극적 생명으로 합일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의미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 첫째, 생명은 ‘자라는 것’이고 기계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 둘째, 생명은 부분의 유기적 ‘전체’이고 기계는 부품의 획일적 ‘집합’이다.
- 셋째, 생명은 ‘유연한’ 질서이고 기계는 ‘경직된’ 통제이다.
- 넷째, 생명은 ‘자율적’으로 진화하고 기계는 ‘타율적’으로 운동한다.
- 다섯째, 생명은 ‘개방’된 체계이고 기계는 ‘폐쇄’된 체계이다.
- 여섯째, 생명은 순환적인 ‘되먹임고리(feedback)’에 따라 활동하고 기계는 직선적인 ‘인과연쇄’에 따라 작동한다.
- 일곱째, 생명은 ‘정신’이다.
4.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우리 민족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한’이란 말로 표현해 왔다. ‘한’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한’은 ‘전체 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이다. 그리고 ‘한’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원심적 확산’과 가운데로 모여지는 ‘구심적 수렴’을 동시에 뜻하기도 한다. ‘한’은 많은 개체를 하나의 전체에 통합하면서 확산과 수렴의 순환적 활동을 수행하는 한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같이 ‘한생명’이라는 우주적인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侍天) 키워 살림으로써(養天)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 첫째, 사람은 물건과 더불어 다같이 공경해야 할 한울이다.
- 둘째, 사람은 자기 안에 한울을 모시고 있다.
- 셋째, 사람은 마땅히 한울을 길러야 한다.
- 넷째, ‘한그릇의 밥’은 우주의 열매요 자연의 젖이다.
- 다섯째, 사람은 한울을 체현해야 한다.
- 여섯째, 개벽(開闢)은 창조적 진화이다.
- 일곱째, 불연기연(不然其然)은 창조적 진화의 논리이다.
5. 한살림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은 모든 개인, 모든 민족, 전 인류, 전 생태계가 한울님, 즉 우주생명의 태 속에서 태어나 한울의 젖을 빨고 자라는 한 형제, 한 동포라는 우주적, 생태적, 공동체적 각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한살림〉은 그 세계관에 있어서는 물질, 생명, 정신이 역동적인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우주생명에 통합되어 가고 있으며 인간, 자연, 우주 모두가 동요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자기를 조직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에서 그 이론적인 전거(典據)를 찾고 있다. 한편 〈한살림〉은 가치관에 있어서는 한민족의 오랜 전통과 맥을 이어오고 있는 동학의 생명사상에서 그 사회적, 윤리적, 생태적 기초를 발견하고 있다. 동학은 물질과 사람이 다같이 우주생명인 한울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임을 깨닫고 이들을‘님’으로 섬기면서(侍) 키우는(養) 사회적, 윤리적 실천을 수행할 것을 우리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자기 안에 통일하면서 모든 생명과 공진화해 가는 한울을 이 세상에 체현시켜야 할 책임이 바로 시천과 양천의 주체인 인간에게 있음을 동학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 첫째,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覺醒)이다.
- 둘째, 〈한살림〉은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다.
- 셋째, 〈한살림〉은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
- 넷째, 〈한살림〉은 새로운 인식, 가치, 양식을 지향하는 ‘생활문화활동’이다.
- 다섯째, 〈한살림〉은 생명의 질서를 실현하는 ‘사회실천활동’이다.
- 여섯째, 〈한살림〉은 자아실현을 위한 ‘생활수양활동’이다.
- 일곱째, 〈한살림〉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활동’이다.
인류의 위대한 추축시대(樞軸時代)에 예수와 붓다에 의해 점화된 ‘사랑’과 ‘자비’의 등불은 2000년 이상 인류를 어둠에서 인도해 왔다. 그러나 산업문명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빛이 희미하게 되었다. 죽임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 사랑과 자비가 생명의 등잔 위에 더욱 큰 불꽃으로 다시 점화되어야 할 것이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인간해방을 선포하면서 혁명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어 온 세계의 억압받고 소외되어 온 계급과 민족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혁명의 깃발은 그 빛깔이 바래져 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의 생산, 분배, 소유를 혁명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인간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만 아니라 생명인 빵의 의미와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시천의 각성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준비하고 있는 각성되고 해방된 인간의 정신은 ‘자기 안에 있는 우주 안에 자기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진화의 분기점에 방황하고 있는 이 시대는 ‘우주 속의 인간’, ‘인간 안의 우주’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닌 새로운 이념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을 펼친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水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