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유토피아』
『너의 유토피아』
- 글: 정보라
- 출판사: 래빗홀
- 발행일: 2025년 01월 15일
차례
- 영생불사연구소
- 너의 유토피아
- 여행의 끝
- 아주 보통의 결혼
- One More Kiss, Dear
- 그녀를 만나다
- Maria, Gratia Plena
- 씨앗
영생불사연구소
연구소 사람들은 모두 다 비밀을 안다. 그 비밀이 뭐냐 하면 우리는 진짜로 영생불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장님이 했던 축사대로 모두 가족이다. 회사는 그만두면 끝이고 친구는 절교하거나 연락이 끊어질 수도 있지만, 가족은 그만두거나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 있 는 한 언제까지나 지고 가야 할 먹고사는 걱정, 밥줄에 대한 집착이 무섭고, 그 집착이 앞으로 198주년, 298주년, 398주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연구소라는 곳에 발목 잡힌 채 끝없이 허덕여야 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슬프고 무서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영생불사를 하건 안 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히 위안이 되는 건 아니지만.
너의 유토피아
일방적으로 침입하는 통신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나는 달렸다. 나는 다른 기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 나는 이동하는 존재이다.
난방 온도를 조절하고, 조명을 끄고, 나는 밤 동안 전력을 소모할 수 있는 모든 장치를 최대한 차단했다. 그리고 아침이 오기를,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언젠가 반드시 충전을 하고나서 다시 듣게 될 그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너의 유토피아는’
여행의 끝
쌍방향 의사소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암호문 작성과 해독으로 보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다. 보고나 명령 등이 이런 종류에 해당한다. 이런 형태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전달할 정보의 내용을 최대한 명확하게 표현하며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 명료함을 나는 사랑했다.
그렇게 나와 녀석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우주선 구석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또 그 알아듣지 못할 말을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주었다. 사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아주 보통의 결혼
“선혁 씨는 내 몸에서 어디가 제일 좋아요?”
(…)
“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손이 제일 좋아.”
“왜?”
그녀가 물었다. 나는 웃었다.
“조그맣고 귀엽고 통통해서. 애기 손 같잖아.” 그리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그 순간 그녀의 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어서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전부를 사랑했다. 어디가 제일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One More Kiss, Dear
One more kiss, dear, one more sigh
Only this, dear, is good-bye ……
Like the sun, dear, up on high
We’ll return, dear, to the sky……
And we’ll banish the pain and the sorrow
Until tomorrow, good-bye ……
나는 계속 물었다.
― 인간은 어째서 노화하고 어째서 죽어야만 합니까? 인간은 어째서 기계가 아닙니까?
―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물의 둥지가 대답했다.
(…)
― 어째서입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물의 둥지가 대답했다.
―인간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만나다
그 봄날에 그녀는 없었다. 조용하고 조금은 나른했던 지하철 안의 풍경과 광장에서 얼굴을 스치던 찬 바람을 나는 가끔 아무 맥락 없이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결코 잊지 않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삶의 엉뚱한 순간들 속으로 과거의 상실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잊지 않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새끼들이 골로 가는 꼬라지를 보고야 말겠다고 나는 살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나도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볼 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 자신이 되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자신을 계속해서 변화시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시선 안에는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이 나를 볼 것이라고 상정하는 시선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Maria, Gratia Plena
탐사선 카시니는 수만 킬로미터 거리를 여행하여 태양계 반대편의 낯선 행성들을 관측하며 20년간 아름답고 신비하 고 때로는 기괴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지구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카니시는 토성의 위성 타이탄 곁을 날아서 지나간 뒤에 토성과 토성의 고리 사이를 다이빙하고, 그런 뒤에 마지막으로 토성의 대기 속으로 뛰어들어 토성과 하나가 되었다.
어떤 기계는 인간보다 행복하다.
씨앗
그러나 씨앗은 살아남을 것이다. 수많은 씨앗 중 하나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하나만 있으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위해서, 우리는 기다린다. 지평선 너머에서 더럽고 거대한 기계의 날개 소리 대신 꽃가루가 날아오는 날을. 바람을 타고 우리가 뿌린 씨앗이 춤추며 돌아오는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