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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별의 먼지에서 모닥불까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별의 먼지에서 모닥불까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이하 EEAAO)와 게임 《Outer Wilds》는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매체의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는 작품이라고 부를 만큼 깊은 주제적 공명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우주의 광활함과 무의미함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답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있다.

허무 앞에 선 주인공

두 작품의 핵심에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보아버린 자의 절망이 있다.

EEAAO에서는 조부 투파키가 만든 모든 것의 베이글(everything bagel)이 그 상징이다. 모든 가능성, 모든 자아, 모든 결과가 한 점에 압축된 검은 구멍. 그것이 가르치는 교훈은 단순하다 —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의미 없다.”

Outer Wilds에서는 우주의 눈(Eye of the Universe)이 그 자리에 있다. 모든 양자적 가능성의 중첩 상태이자 우주의 시원. 그리고 그 우주는 22분 후 초신성으로 폭발하며 끝난다. 무한한 가능성과 절대적 종말이 동시에 던져진 풍경이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을 이 “모든 것 + 무(無)”의 감각 앞에 데려다 놓고 묻는다. 이걸 본 후에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받아들임이라는 답

흥미롭게도 두 작품의 답은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에블린은 허무를 거부하고 사랑을 선택한다. Hearthian 우주비행사는 우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우주에 자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더 깊이 보면 둘 다 결국 같은 행위 — ‘받아들임’이다. 에블린은 자신의 실패한 인생, 깨진 결혼, 딸의 고통, 우주의 무의미함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길을 택한다. Hearthian은 친구들과 자신의 죽음, 종(種)의 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을 노래로 채운다. 둘 다 부정이나 정복이 아닌, 끌어안기를 선택한다.

가장 작은 것의 신성함

두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면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EEAAO의 돌멩이 대화 장면 — 광활한 절벽 위에서 두 개의 돌이 자막으로 나누는 모녀간의 가장 솔직한 대화. Outer Wilds의 엔딩 모닥불 — 우주가 끝나기 직전, 친구들이 모여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는 마지막 합주.

두 장면 모두 우주적 스케일과 가장 작고 친밀한 순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킨다. 거대함은 무대일 뿐, 진짜 무게는 따뜻하고 작은 것에 있다는 메시지. 이건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니라 두 작품의 철학적 핵심이다 — “의미는 위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옆에서 발견된다.”

호기심과 친절함

두 작품이 제시하는 “허무에 대한 답”은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Outer Wilds의 답은 호기심과 우정이다. Hearthian들이 우주로 나가는 이유는 정복이나 자원이 아니다. 그저 알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죽음 앞에서도 동료의 음악을 향해 가는 것.

EEAAO의 답은 친절함과 사랑이다. 웨이몬드의 그 유명한 대사 — “내가 좋은 면을 보려고 할 때, 그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그게 내 전략이야.”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적 태도의 선택.

두 작품 모두 거창한 답을 거부한다. 답은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매일의 자세 속에 있다는 것. 그래서 두 주인공이 모두 ‘평범한’ 존재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이민자, 손수 만든 우주선을 타는 작은 외계인. 영웅적 자질은 출신이 아니라 돌봄과 호기심에서 나온다.

수공예의 미학

두 작품의 형식적 선택도 닮아 있다. EEAAO의 구글리 아이, 허리쌕, 비교적 저예산의 따뜻한 질감. Outer Wilds의 로우폴리 그래픽, 나무로 만든 우주선, 마시멜로와 캠프파이어. 둘 다 의도적으로 ‘수공예적’이고 ‘집에서 만든 듯한’ 미학을 채택한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우주적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친숙하고 손맛이 느껴지는 미학을 입을 때 생기는 특유의 감정적 효과 — 거대한 무대 위에 놓인 작고 따뜻한 인간(혹은 외계인)의 윤곽 — 이 두 작품의 트레이드마크다.

반복과 변주

형식적 메아리도 하나 있다. Outer Wilds는 22분 시간 루프 위에 세워진 게임이고, EEAAO는 버스점핑을 통한 무한한 자아의 변주 위에 세워진 영화다. 둘 다 반복을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주제 그 자체로 활용한다 — 반복 속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 무엇이 변할 수 있는가, 어느 순간 우리는 루프를 끝낼 준비가 되는가.


그리고 칼 세이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사실 EEAAO와 Outer Wilds 모두의 정신적 조부모라고 부를 만한 작품이다. 두 작품이 도달한 “포스트-허무주의적 따뜻함”의 원형이 『코스모스』에 이미 있다.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원형

세이건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보이저 1호가 60억 km 밖에서 찍은 지구 사진 —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다. 그가 그 점을 두고 한 성찰은 이렇게 흘러간다. 이 작은 점 위에서 모든 사랑하는 이들, 모든 전쟁, 모든 영웅과 악당, 모든 문명이 살고 죽었다. 우주의 광활함 속에서 우리의 자만은 우스워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에 더 다정해야 한다.

이 한 단락 안에 EEAAO와 Outer Wilds의 핵심 운동이 모두 들어있다 — 거대함을 응시함으로써 작은 것의 소중함에 도달하기.

EEAAO의 돌멩이 장면이 본질적으로 Pale Blue Dot의 영화적 번역이다. 거대한 무생물의 우주를 배경으로, 그 안의 두 작은 점이 “그래도 너와 여기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 Outer Wilds에서 행성 사이를 떠다닐 때 보이는 자신의 작은 우주선과 더 작은 고향 별 Timber Hearth 역시 같은 구도다.

우리는 별의 먼지로 만들어졌다

세이건의 또 다른 핵심 명제 — “We are made of star-stuff.” 우리 몸의 모든 무거운 원소는 죽어가는 별의 핵에서 만들어졌고 초신성을 통해 우주에 흩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방식이다.

Outer Wilds는 이 명제의 거의 문자적 게임화다. 게임의 핵심 미스터리는 별이 죽어야 새 우주가 태어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Nomai 종족이 우주의 눈을 깨우려 했고, 결국 Hearthian이 그 일을 완성한다 — 옛 우주의 마지막 의식이 새 우주의 첫 빛이 되는 것. 이건 세이건의 “별의 먼지” 신학을 그대로 가져와 게임 메커니즘으로 만든 것에 가깝다.

EEAAO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베이글이라는 “모든 것이 압축된 점”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상징하고, 에블린이 모든 가능 자아의 기억과 능력을 관통할 때 그녀는 잠깐 우주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통로가 된다. 세이건이 말한 “우주가 의식을 통해 자기를 본다”는 그 순간이 SF적 액션으로 번역된 셈이다.

호기심이라는 종교

『코스모스』의 진짜 혁신은 과학을 차가운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경외와 사랑의 행위로 그려낸 것이다. 세이건에게 망원경을 통해 본 토성의 고리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종교적 경험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어딘가에서, 무언가 놀라운 것이 알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Somewhere, something incredible is waiting to be known).”

Outer Wilds는 이 정신을 게임 디자인의 근간으로 삼는다. 게임에는 무기가 없고, 적이 없고, 레벨업도 없다. 진행을 만드는 유일한 통화는 지식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 이해 자체가 다음 문을 연다. 죽기 전 마지막 22분 동안에도 Hearthian은 정복하지 않고 알아간다. Nomai 종족 전체가 그렇다 — 그들이 남긴 모든 흔적은 “우리는 알고 싶었다”는 기록이다. 게임 전체가 세이건적 호기심에 바치는 헌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EEAAO는 호기심보다는 공감으로 길을 낸다. 에블린이 다른 생애의 자신들을 만나는 건 본질적으로 “나일 수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다. 세이건이 외계 문명을 상상할 때의 그 태도 —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만큼 진짜인 의식을 진지하게 대하기 — 가 가족 드라마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다중우주는 결국 급진적 공감을 위한 장치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자세

세 작품 모두 두 단계의 운동을 공유한다.

첫째, 우주가 광대하고 우리에게 무관심하며 결국 끝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둘째, 그 사실에 절망으로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다정해지기.

세이건은 이걸 명시적으로 말한다. 우리를 구해줄 외부의 존재는 없으니, 우리가 서로에게 더 친절해야 한다고. 종교적 위안 없이도 윤리는 가능하고, 오히려 더 긴급해진다고.

EEAAO의 웨이몬드는 이 입장의 극화된 버전이다. “친절함은 순진함이 아니라 전략이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깨달음 후의 친절함은 더 이상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의식적 선택, 거의 반항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Outer Wilds의 엔딩 합주도 같은 논리다. 우주가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 아니, 알기 때문에 — 마지막 음악을 함께 만드는 것. 이건 부정이 아니라 가장 성숙한 형태의 긍정이다.

정리하며

세 작품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도 있다. 세이건은 본질적으로 낙관주의자였고, 인간이 (특히 과학을 통해) 자신을 더 나은 종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Outer Wilds는 그 믿음을 종족 단위의 우아한 죽음과 새 우주의 탄생으로 확장한다 — 우주적 스케일의 낙관. EEAAO는 가장 친밀한 스케일에서, 거의 절망 직전까지 갔다가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답을 발견한다.

세이건이 천문학자의 시선이라면, Outer Wilds는 그 시선을 게임플레이로 만든 것이고, EEAAO는 그 시선을 부엌 식탁으로 가져온 것에 가깝다.

세 작품을 함께 놓으면 일종의 세속적 영성의 계보가 보인다. 우주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동시에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 그 긴장 속에서 호기심·친절·공감·경외를 삶의 의미로 발견하는 길. 세이건이 1980년에 다큐멘터리로 제시한 그 비전이, 40년 후 한 인디 게임과 한 인디 영화에서 각자의 매체에 맞게 재발견되고 있는 셈이다.

이 노선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아마 — 우주가 점점 더 커 보이고 우리는 점점 더 작아 보이는 시대에, 이 자세가 거의 유일하게 정신적으로 지속 가능한 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