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NIC》 — 읽을 수 없는 설명서를 읽는 법
귀여운 여우의 탈을 쓴 퍼즐
튜닉(TUNIC)이 어떤 게임이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답하기 쉽지 않다. 흔히 젤다의 전설과 다크소울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평하는데, 그저 귀여운 여우 캐릭터가 탐험하며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큰 오산이다. 튜닉의 핵심은 전투가 아니다. 이 게임은 철저히 한 편의 퍼즐이고, 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하도록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호기심이다. 그리고 내게는 올해 발견한 최고의 게임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튜닉을 사랑하는 이유를 남겨본다.
설명서를 완성하는 게임
튜닉에는 별도의 도움말 메뉴가 없다. 대신 게임 속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설명서 책자를 통해 세계관과 조작법, 지도, 힌트를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 설명서조차 완성본이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흩어진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주워 모아야 전체 내용을 알 수 있다.
게임을 하기 위해 설명서를 읽는 게 아니라, 설명서를 완성하기 위해 게임을 하게 되는 전도(顚倒). 튜닉은 ‘게임에 대한 지식’ 그 자체를 수집의 대상이자 보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설명서를 뒤적거리다 보면 어렸을 때 영어나 일본어 매뉴얼을 보며 게임을 하던 것과 같은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향수는 우연이 아니다. 이 설명서는 처음 보는 문자로 가득해서, 플레이어는 강제로 문맹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맹의 경험 — 읽을 수 없는 것을 읽는다는 것
설명서의 페이지들을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글자는 못 읽어도 이미지와 기호들이 기가 막히게 구성되어 있어 어느 정도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해석은 끝내 불가능하다. 바로 그 점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끝까지 호기심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생각해보면 이건 굉장히 근본적인 경험을 시뮬레이션하는 거다. 우리는 누구나 문맹으로 태어난다. 아이는 그림책의 글자를 읽지 못한 채 그림과 어른의 표정과 목소리의 높낮이로 세계를 유추한다. 낯선 나라에 떨어진 여행자도 마찬가지다. 튜닉은 그 상태 — 기호의 바다에서 맥락만으로 의미를 더듬는 상태 — 로 플레이어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 상태가 얼마나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설레는 것이었는지 다시 느끼게 해준다.
이 게임의 열쇠는 아이템이 아니라 ‘앎’이다
튜닉의 세계는 숨겨진 길과 비밀로 가득하다. 그런데 플레이를 하다 보면 재밌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막혀 있던 길을 여는 건 대부분 새로 얻은 아이템이 아니라 새로 알게 된 지식이라는 거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던 장소가, 설명서의 어느 페이지를 이해하고 난 오늘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세계는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져서 길이 열리는 구조.
심지어 게임의 최종 관문조차 그렇다. 튜닉에는 두 개의 클리어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정당한 계승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명서에 “지식 공유”라고 적혀 있는 조건 — 즉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으로 왕좌를 차지하는 길은 배드 엔딩으로 이어진다. 진짜 엔딩은 싸워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읽어낸 자, 이해한 자에게만 열린다.
폭력이 아니라 이해가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것. 《언더테일》이 전투 시스템으로 던졌던 질문을, 튜닉은 퍼즐과 문자 체계로 다시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혼자 풀어야 한다
튜닉은 공략을 찾아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플레이하는 걸 추천한다. 나는 이 게임의 퍼즐들을 풀기 위해 따로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고, 화면 캡처 이미지를 자르고 회전해서 조합하기도 했다. 어떤 퍼즐은 며칠 동안 풀지 못해 하루 종일 맵을 돌아다니며 실마리를 뒤적거리기도 했다. 꽤나 애를 먹었지만, 결국 혼자 힘으로 마지막 퍼즐을 풀어냈을 때 그 성취감은 너무나 짜릿해서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 튜닉 최종 퍼즐을 혼자 풀어낸 게 올해 내 최대 업적이 아닐까 싶다. 😭)
결국 해답은 설명서에 있더라.
아무튼 내게는 튜닉이 올해 최고의 게임이었다. 호기심으로 충만한 어드벤처 게임 마니아들에게 강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