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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anium Court》 — 다 보지 않고 떠나는 법

《Titanium Court》 — 다 보지 않고 떠나는 법

숲길을 걷다가, 세상이 타일로 변했다

《Titanium Court》는 토끼굴 대신 타일로 시작한다. 연극 무대의 막이 오르는 듯한 인트로가 지나면 주인공은 평범하게 숲을 걷고 있다. 그러다 발밑 풍경이 흔들리며 타일로 바뀌고, 같은 모양 세 개를 맞추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타일을 맞추다 보면 성이 하나 솟아오르고, 주인공은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요정들의 여왕으로 추대된다. 왜 내가 여왕인지, 여기가 어딘지, 왜 성문이 열리지 않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르지 않기는 어렵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다른 세계로 떨어지고, 그곳 주민들은 제멋대로의 논리로 말하며, 주인공은 그 논리를 익혀야 겨우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 목표도 앨리스와 같다. 집에 돌아가는 것.

개발자 AP Thomson은 이 게임을 “광대와 범죄자를 위한 초현실 전략 게임”이라고 소개한다.

장르의 잡탕은 이상한 나라의 문법이다

이 게임의 장르를 한 줄로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매치-3 퍼즐 RPG를 뼈대로 타워 디펜스, 포인트 앤 클릭, 로그라이트, 자원 관리, 덱빌딩, 비주얼 노벨이 뒤섞여 있다. 전투는 두 단계로 나뉜다. 만조(High Tide)에는 타일을 맞춰 자원을 모으고, 간조(Low Tide)에는 그 자원으로 병사나 농부를 배치한다. 여기에 재밌는 규칙이 붙는다. 강 타일로 성을 둘러싸면 해자가 되어 적의 진군을 막고, 적의 성끼리 매치시키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적을 없애버릴 수 있다.

적을 “맞춰서 지운다”는 발상은 전쟁 게임의 문법으로 보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문법으로 보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크로케 공은 고슴도치고 방망이는 홍학이다. 도구가 원래 용도대로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규칙은 발견하는 것이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이 게임의 장르 혼합도 같은 효과를 낸다. 익숙한 장르의 조각들이 원래와 다른 자리에 끼워져 있어서, 플레이어는 매 순간 “이게 여기서는 무슨 뜻이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 격자판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도 겹친다. 그 책 전체가 한 판의 체스 게임이고, 앨리스는 졸(pawn)로 시작해 판의 끝에 도달하면 여왕이 된다. 《Titanium Court》의 주인공도 격자판 위에서 영문도 모른 채 여왕이 된다. 다만 순서가 반대다. 앨리스는 여왕이 되기 위해 판을 건너가지만, 이 게임의 여왕은 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운다.

티타니아, 퍽, 그리고 한여름 밤의 꿈

앨리스가 첫인상이라면, 이 게임의 뼈대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다. 제목의 Titanium은 요정 여왕 티타니아(Titania)에서 온 말장난이고, 주인공 곁에서 궁정 일을 보는 집사의 이름은 퍽(Puck)이다. 원작에서 숲에 들어간 인간들은 요정의 장난과 마법, 사랑의 묘약에 휘말려 변하고, 직공 보텀은 머리가 당나귀로 바뀌기까지 한다. 게임에도 묘약이 나온다. 초반에 여왕은 탈출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야구를 사랑하게 되는 묘약’을 마신다. 원작의 사랑의 묘약이 엉뚱한 상대에게 빠지게 만들었듯, 이 게임의 묘약은 엉뚱하게도 야구에 빠지게 만든다.

Titanium이라는 이름에는 하나의 층위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티타늄은 녹슬지 않는 금속이다. 요정들은 불멸의 존재라 매일 전쟁터에서 죽고 밤이면 다시 모여 술을 마신다. 부식되지 않는 궁정, 끝나지 않는 전쟁. 그런데 이 게임은 그 ‘녹슬지 않음’에 균열을 낸다. 요정들은 죽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라질 수 있다.

불멸의 요정들이 두려워하는 것: 스테일(Stale)

게임 중반쯤, 궁정의 요정들이 하나둘 ‘스테일(Stale)’해지기 시작한다. 김이 빠졌다, 신선함을 잃었다는 뜻이다. NPC로서 더 이상 할 새로운 대사가 없어지면 걸리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다. 스테일해진 요정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끝없는 연회장으로 끌려가 거기서 영원히 자기 대사를 반복한다.

이게 이 게임의 핵심 장치다. 모든 게임에는 이런 순간이 있다. 좋아하던 캐릭터가 마지막 대사를 다 소진하고, 말을 걸 때마다 같은 문장만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그걸 그냥 “컨텐츠를 다 봤다”고 부른다. 《Titanium Court》는 그 순간을 세계관 안의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요정들을 스테일하게 만드는 원인은 다름 아닌 플레이어다. 여왕이 궁정에 머물면서 말을 걸수록, 이야기를 끝까지 파헤칠수록 요정들은 소진된다. 퍽이 처음부터 제발 떠나라고 애원하고, 여왕과 대화하기를 두려워했던 이유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 자신이 스테일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플레이어라는 괴물

앨리스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이상한 세계에 휘둘리는 쪽이다. 《Titanium Court》는 이 구도를 뒤집는다. 이상한 나라가 위험한 게 아니라,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나’가 그 세계에 위험한 존재다.

탈출 조건은 단순하다. 열쇠 네 개만 모으면 언제든 성문을 열고 게임을 끝낼 수 있다. 문제는 그때쯤 해결되지 않은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궁정에는 13개의 저주가 걸려 있고,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가보지 못한 통로가 잔뜩 남아 있다. 게이머의 본능은 말한다. 조금만 더.

게임은 그 본능을 정확히 겨냥한다. 후반에는 난이도를 대폭 낮춰주는 ‘안락(Comfort)’이라는 선택지와 업그레이드 트리까지 주어지는데, 이건 도움이라기보다 “계속 플레이할 이유”를 하나 더 얹어주는 미끼에 가깝다. 한 리뷰어는 첫 업그레이드를 고르는 순간 가장 가까운 친구 하나가 스테일해진다고 적었다. 그리고 여왕을 궁정에 붙잡아두려는 적의 이름은 그냥 ‘적(Enemy)’이다. 그는 플레이어가 계속 플레이하도록 붙잡아두는 싸움 자체를 즐기며, 그렇게 간접적으로 궁정을 무너뜨리고 요정들을 스테일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적’은 우리 안의 “조금만 더”를 의인화한 존재다.

로그라이크라는 장르 선택이 여기서 의미를 갖는다. 로그라이크는 원래 무한 반복을 전제로 한 장르다. 죽고, 다시 하고, 조금 더 강해져서 또 다시 한다. 후반부의 이 게임은 사실상 안티-로그라이크가 되어, 이런 장르라면 무한한 플레이타임과 끝없는 컨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오랜 관습을 거부한다. 반복이 곧 소모가 되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는 덜 플레이하는 것이다.

상징 읽기

조수(Tide)

궁정은 땅에 뿌리박은 성이 아니라 조수 위를 떠다니는 성이다. 만조와 간조가 번갈아 오듯 전투도 매일 같은 리듬으로 반복된다. 조수는 로그라이크의 반복 구조 그 자체이자, 시간의 은유다. 밀물은 언젠가 썰물이 된다. 엔딩에서 여왕이 떠난 뒤 궁정이 조수에 씻겨 사라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복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물은 빠진다.

야구

야구는 게임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프다. 요정들은 야구를 사랑하게 되지만 규칙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이닝 사이에 나오는 보험 광고가 경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건 앨리스의 세계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기묘하고 신비로운 의식이 된다. 요정들은 도로 표지판을 해독하지 못하고, 가장 하찮은 문구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을 읽어낸다. 험프티 덤프티가 “내가 어떤 말을 쓰면 그 말은 내가 정한 뜻이 된다”고 했던 것처럼, 이 궁정에서는 기호와 의미가 제멋대로 떨어졌다 붙는다. 그리고 그 오독 덕분에 평범한 세계가 마법처럼 보이게 된다. 야구는 “세상을 경이롭게 볼 것인가, 소모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가볍게 던지는 장치다.

거울

궁정에는 거울이 있고, 저주 중 하나는 그 거울 속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해 반대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들어갔다면, 이 게임에서 거울은 결국 화면 밖을 비춘다. 게임 전체가 플레이어 자신의 습관, 그러니까 끝까지 다 먹어치우려는 욕구를 비추는 거울로 설계되어 있다.

고양이

궁정에는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다닌다. 요정이 아니니 스테일해질 일도 없다. 그런데 어느 밤 복도에서 그 고양이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고, 그 순간 궁정의 ‘순수의 저주(Curse of Innocence)’가 풀린다. 불멸의 요정들이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체셔 고양이는 웃음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이 고양이는 죽음을 남긴다. 저주를 푸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 어떤 저주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열쇠 네 개와 13개의 저주

열쇠는 ‘떠날 자격’이고, 저주는 ‘남아 있을 이유’다. 게임은 떠날 자격을 비교적 빨리 주고, 남아 있을 이유는 끝없이 늘어놓는다. 13개의 저주를 모두 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저주를 전부 풀면, 즉 도전과제를 모두 달성하면 마지막으로 ‘동료의 저주(Curse of Company)’까지 풀려 궁정에는 스테일해졌거나 떠나버린 요정들만 남는다. 완벽하게 클리어한 세계는 텅 빈 세계다.

퍽의 에필로그

『한여름 밤의 꿈』의 마지막은 퍽의 독백이다. 그는 무대에 홀로 남아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그림자들이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이렇게만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테니.
여러분은 그저 여기서 잠시 졸았을 뿐이고,
그동안 이 환영들이 나타났던 거라고.

그리고 박수를 청하며 끝난다. “친구라면 손을 내어주세요.” 연극은 스스로 꿈이었다고 고백하고, 관객을 극장 밖 현실로 돌려보낸다. (덧붙이면, 원작에서 퍽의 다른 이름은 ‘로빈 굿펠로’다. 게임 속 궁정에 로빈이라는 요정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 같다.)

《Titanium Court》도 같은 방식으로 끝난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여왕은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 즉 플레이어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녀는 둘을 분리하는 주문을 알고 있지만 궁정 밖에서만 걸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주문이 바로 엔딩 크레딧이다. AP Thomson은 인터뷰에서 이 게임이 플레이어를 바꾸려는 시도이며, 그들을 향해 던지는 일종의 주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문이 무엇을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퍽의 에필로그처럼, 무대는 끝났고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마지막 장 제목은 “누가 꿈을 꾸었나?”다. 앨리스는 자신이 붉은 왕의 꿈을 꾼 건지, 붉은 왕이 자기 꿈을 꾼 건지 끝내 확신하지 못한다. 이 게임의 여왕과 플레이어 관계도 비슷하다. 여왕의 모험을 내가 조종한 건지, 여왕이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준 건지. 크레딧이라는 주문은 그 둘을 떼어놓는 의식이다.

뒤돌아보지 마라

열쇠 네 개로 성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게임은 마지막으로 궁정을 한 번 돌아보겠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오르페우스를, 롯의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떠나는 자가 뒤돌아보는 순간 무언가를 잃는다는 오래된 이야기들.

돌아보지 않으면 궁정은 조수에 씻겨 사라지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주인공은 버스 정류장에 남겨진다. 지난 컷신을 모아둔 일지를 넘겨보고 간단한 매치-3를 즐길 수는 있지만, 이야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앨리스는 언니의 무릎 위에서 깨어났고,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깨어난다. 둘 다 평범한 세계로의 귀환이지만, 돌아온 사람은 들어가기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개발자는 이렇게 말한다. 게임을 구석구석 다 보는 것도 정당한 방식이지만, 자신이 게임에서 가장 좋았던 경험들은 많은 부분을 탐험하지 않은 채 떠났을 때였고, 그래야 게임이 상상 속에서 훨씬 크게 살아남는다고. 실제로 스테일해진 요정들을 지켜보며 끝까지 남은 플레이어들이 본 엔딩은 더 나은 엔딩이 아니었다고 한다. 완주는 보상이 아니라 소모의 기록이었다.

정리하면

《Titanium Court》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이야기처럼 시작해서, 이상한 나라를 떠나는 법에 관한 이야기로 끝난다.

게임은 장르의 조각들을 뒤섞어 익숙한 규칙을 낯설게 만들고, 요정들의 오독을 통해 평범한 세계를 경이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이를 끝까지 소비하려는 우리의 습관을 ‘스테일’이라는 장치로 거울처럼 비춘다. 불멸의 존재를 죽이는 건 칼이 아니라 싫증이고, 그 싫증은 우리가 가져온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여왕이 되었다가 깨어났다. 이 게임의 여왕은 궁정을 다 누리지 않고 떠나야 비로소 여왕다워진다. 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남는 것들이 있다. 그 궁정은 이제 게임 파일 속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계속 조수를 타고 떠다닌다.

친구라면 손을 내어주세요. 그리고 뒤돌아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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